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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의 음악] 메시앙을 만나기까지 (김순배) 2010.07.07

My Beloved Classical Music

 

메시앙을 만나기까지

 

글 _김순배 음악 칼럼니스트, 한세대학교 피아노 페다고지대학원 겸임교수

 

애호가들에게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할 클래식 음악이 전공자에게는 종종 치열한 애증의 대상이 된다. 사랑하기에 미워하는 혹은 너무 사랑하지만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어 마침내 사랑이 변해 미움이 되는 일이 통속적인 러브스토리 라인에서 뿐 아니라 클래식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그 애증의 표출방식은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 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속라인의 공식을 다시 한 번 빌리면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는 현상 쯤 될까? 한 눈 판 애인은 나중에 상대에게 이렇게 얘기할 것이 뻔하다. ‘결코 네가 싫거나 싫증나서가 아니었어!’, ‘잠시 다른 사람에게 끌리기는 했지만 역시 돌이켜보니 너 만한 사람이 없더군!’ 전공자들에게 클래식 음악은 결국 필연이자 숙명인 거다.

 

운명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시간
그렇게 음악은 오랫동안 내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글렌 굴드가 함께한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이 복사판이 횡행하던 시절 귀티 나는 원판의 상태로 내 손에 들어왔을 때에도 이미 나는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The Boxer’나 ‘Bridge over troubled water’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글렌 굴드의 황제 이후에 사실 어떤 ‘황제’도 내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브한 영혼에 가해진 영향력으로 말하면 S&G가 한 수 위였다. 중고교시절 시험시간에 답안지는 건성으로 후딱 적어내고 남은 시간에는 시험지 뒷면에 이들 노래의 가사들을 충실히 써내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팝송가사를 외우면 영어실력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 불확실한 이론이 아니더라도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이들의 가사를 외우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일은 나를 영어는 몰라도 팝송 우등생으로 만들어주기는 했다. 여기저기에 S&G와 관련한 글을 싣기도 했고 민간 고교생의 신분으로 라디오 팝송 프로에 해설 게스트(?)로 나가기까지 했으니까.  한편 해마다 4월이 되면 수난절을 묵상하는 바흐 선생의 위대한 ‘마태수난곡’과 함께 딥 퍼플의 ‘4월(April)’ 또한 통렬하게 내 방에서 울려 퍼지고는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접한 리게티의 ‘레퀴엠’이 뿜어내던 호러(horror)감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한밤중 바그너의 귀기어린 ‘탄호이저 서곡’을 듣다가 소스라쳐 놀란 후 마음을 달래려고(!) 틀었던 것은 ‘시카고(Chicago)’나 ‘보스톤(Boston)’ 같은 소프트 락 그룹의 음악이었다. 음악 감상실을 가도 바로 이웃하고 있는 ‘바로크(Baroque)’와 ‘내쉬빌(Nashville)’을 번갈아 드나들다보니 마치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넘나드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두 종류의 음악이 섞인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내 영혼은 줄곧 놓여있었던 것이 맞다. 그러니까 내 사랑은 온전히 수렴할 지점을 정하지 못한 채 그 운명의 대상을 여전히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강력하게 설득할 만한 음악의 원형을 향한 끊임없는 갈증을 채우지 못해 낭비했던 정체불명의 시간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영혼을 사로잡은 ‘아기 예수’
유학시절 학위논문을 올리비에 메시앙으로 결정했다. 당시 같은 유학생이 내게 물었다 ‘왜 하필 메시앙인가?’ 나의 대답은 ‘메시앙이니까…’였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당시에도 메시앙은 난해한 현대작곡가들의 대명사였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방대한 규모와 심원한 콘텐츠로 정평이 나있는 피아노 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눈길’에 나의 눈길은 집중되었다 어쩌면 그즈음 나의 관심은 ‘영성 (spirituality)’에 쏠려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흐 이후, 종교적인 기능이나 용도를 위한 작품들 말고 그 내부 깊숙한 곳에 어떤 영성에의 추구나 갈망이 담긴 작품을 접해본 기억이 없었다. 사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 근저에 깔린 신비함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막강한 내공이 필요할 터였다. 그렇듯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의 음악적 레이더망에 메시앙은 계시처럼 불현듯 그러나 급속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며 다가왔다. 난해함이 문제라면 풀어가며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품 ‘아기 예수~’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도 같았다. 건물 외부에서는 아무 광채도 빛깔도 없이 컴컴하게 보일 뿐이지만 내부에 들어가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찬연한 색의 분할과 혼합과 조화의 섬세함과 절묘함이 보는 이들의 시각과 영혼을 황홀하게 사로잡는 그것.  ‘아기 예수~’는 마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어서 자신의 내부로 들어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찬란하고 엄숙한 빛과 색의 향연에 온 마음으로 동참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음악의 본질과 닮아있었다. 밖에서 바라보면 아무 빛깔도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일단 나 자신을 그 내부로 들여보내면 지금까지 몰랐던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메시앙의 ‘아기 예수~’는 나의 전공과 연관되어서도 그리고 나의 삶 자체에서도 결정적 분수령이 되어준 작품이다.

메시앙 자신도 ‘20세기 음악의 분수령’이 되어준 존재이다. 온갖 새로운 기법이 출현하고 실험되던 20세기 전반을 지나 또 다른 전환의 국면을 향하던 1940-50년대 메시앙이 음악사에서 걸머졌던 실제적 역할과 상징적 의미는 중차대하다. 그 때까지 제시되었던 모든 경향과 기법을 총망라 및 정리함과 동시에 앞으로 올 음악에 영감과 비전을 던져 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음악은 내 같은 학교 선배가 던졌던 ‘왜 하필 골치 아픈 메시앙인가’와 같은 질문에서도 묻어나듯 얼핏 난삽하고 재미없어 보인다. 그러나 일단 그 안으로 진입할 때 신비로운 세계가 홀연 펼쳐지고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이미 이전의 자신과는 달라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모종의 힘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의 메리트 및 위대함의 생생한 징표가 아닐까? 오래전 바흐와 딥 퍼플 사이의 방황도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전향적인 경험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메시앙, 아니 음악의 힘은 세었다. 마침내 그 힘의 실체와 대면한 이후 진정한 클래식 사랑의 여정은 꿋꿋하고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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