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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지휘자] 존 바비롤리 (유윤종) 2010.07.07

Legendary Maestros

격정적 에너지를 내뿜다 존 바비롤리John Barbirolli

 

글 _유윤종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6월 2일, 44세의 지휘자 존 바비롤리가 영국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순탄치 않은 여정이었다. 미국 뉴욕을 출발하기 직전 배우 레슬리 하워드가 어떤 이유에선지 ‘비행편을 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하워드를 태운 비행기는 비행 도중 독일 공군에 격추됐다.
구사일생으로 맨체스터에 나타난 마에스트로를 맞이한 할레 교향악단 단원들은 단 30명이었다. 젊은 단원들이 전쟁터나 군수시설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BBC 노던 오케스트라에 겹치기 출연하는 단원들에게 한 쪽으로 소속을 정하라고 요구하자 단원은 23명으로 줄었다. 7년 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뉴욕에 입성했던 영국 출신 마에스트로에게는 신통치 않은 대접이었다. 첫 공연은 7월 5일로 예정된 상태였다.
지휘자는 ‘맨체스터 주변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오디션 계획을 발표했다. 한 달 동안 오디션이 이어졌다. 플루트 수석주자로는 중학교를 다니는 소년이 뽑혔다. 초등학교 여교장 선생님은 호른 주자가 됐다. 인근 지역의 아마추어 브라스밴드 단원들이 금관을 채웠고 구세군 밴드 여단원 한 사람도 트럼본에 가세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훗날 영국 음악전문지 뮤지컬 타임스는 “바비롤리 취임 초기부터 이 악단은 화염과 같은 집중력과 빛나는 온기를 갖췄다”고 평가했다. 이후 마에스트로와 이 악단은 27년을 함께 했고 EMI사에서 발매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 등 음반사의 빛나는 기념물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존 바비롤리(1899~1970)의 수많은 성취 중에서 할레 교향악단과의 성과는 중요한 부분이었을지언정 그 전부는 아니었다.

 

흰 장갑의 지휘자에게 매료되다
조반니 바티스타 바르비롤리는 1899년 런던 중심부 홀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조부는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지내다 대영제국의 부를 좇아 런던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이민이었다. 어머니도 프랑스 출신이었으니 훗날 대지휘자가 되는 조반니(존)는 영국인 피가 섞이지 않은 영국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훗날 그는 스스로 ‘코크니(런던 토박이 서민)’이라고 말하곤 했다.
조반니가 어릴 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웨스트엔드의 극장에서 극음악을 반주하는 악단원으로 활동했다. 어린 조반니는 종종 엠파이어 극장의 객석에 앉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참여하는 연극 리허설 장면을 보곤 했다. “맨 처음부터 지휘자가 내 마음을 끌었다. 얼마나 장엄한 존재인가! 나는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의 흰 장갑을 가져다 낀 뒤 방 문을
닫고 혼자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손으로 지휘 흉내를 냈다. 당시 극장 지휘자는 흰 장갑을 꼈기 때문이다.”
네 살 때 집에 악기장인이 작은 첼로를 들고 찾아왔다. 어린 조반니를 의자에 앉히고 무릎 사이에 첼로를 끼워준 뒤 활을 들리고는 외쳤다. “자, 얘야! 이제 이게 네가 연주할 악기란다.” 악기는 조부가 주문해 둔 것이었다.
그가 15살 때 터진 1차 세계대전은 이듬해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1918년 그는 징집돼 전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은 그가 바라던 ‘지휘’를 처음 경험할 수 있는 무대였다. 음악가 출신 병사들로 구성한 무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그는 주페의 ‘경기병 서곡’ 등을 연주했다. 전쟁 중에 불타는 애국심으로 이름도 ‘조반니’ 대신 ‘존’으로 바꿨다. 훗날 그는 “높은 장교들이 나를 ‘가이 반니’라고 잘못 부르는 통에 이름을 바꿨다”고 웃음 섞어 말하곤 했다.
전후 실력 있는 오케스트라 첼로 연주자 겸 솔리스트로 명성이 높아졌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지휘대를 향하고 있었다. 뉴캐슬에서 지휘한 구노 ‘로미오와 줄리엣’, 베르디 ‘아이다’, 푸치니 ‘나비부인’이 성공을 거두자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 제의가 들어왔다. 1928년 29세의 젊은 지휘자는 어릴 때 놀던 코벤트가든 시장 앞의 로열오페라에 ‘나비부인’으로 데뷔했다.
콘서트 지휘자로서 전기가 찾아온 것은 1927년이었다. 런던 심포니를 지휘한 엘가 교향곡 2번 공연에 작곡가가 찬사를 보냈다. 1933년에는 훗날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되는 ‘스코티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됐다. 영국 내에서 이름이 높아가고 있었지만 아직 국제적으로는 무명에 불과했다.
1936년 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NBC 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긴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37세의 젊은 영국 지휘자 존 바비롤리를 지명했다. 2009년 40세로 이 악단에 입성한 앨런 길버트도 깨지 못한 이 악단 최연소 음악감독 기록이다. 입방아가 뒤따랐다. 악단 이사회가 토스카니니급 지휘자의 고액 연봉에 넌덜머리를 냈다던가, 대중에게 어필할 가벼운 레퍼토리 연주 압력을 수용할만한 젊은 지휘자가 필요했다는 등. 그러나 이후 전개된 상황을 보면 이런 루머들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이사회는 처음 푸르트벵글러에게 토스카니니의 후임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최종 단계에서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 대안으로 뉴욕에 입성한 바비롤리는 취임후 브리튼이나 바버, 이베르 등의 동시대 음악을 자주 프로그램에 올렸다.
2차대전이 터지자 바비롤리는 폭격에 시달리는 고국에 신경이 쓰였다. 설상가상 미국 음악인 노조가 “미국내 활동 음악가들은 미국 국적을 갖기 요망함”이라는 규정을 도입하려 한 것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1943년, 그는 뉴욕에서의 성과를 미련 없이 뒤에 남기고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할레 교향악단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화염과 같은 집중력과 빛나는 온기’
전쟁 이후의 세월은 바비롤리에게 ‘할레 왕국 시기’로 일컬어졌다. 좋아하는 작품은 뭐든 지휘할 수 있었고 간섭이라곤 일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마음먹은 대로, 무한대에 가까운 오케스트라 연습 시간을 주장할 수 있었다. 워너사가 발매한 ‘지휘의 예술(The art of Conduncting)’에는 바비롤리가 브루크너 교향곡 7번 3악장의 현악 개시음형만을 놓고 끝없이 반복연습을 이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마저 4분이 넘는 원본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친구인 음악평론가 네빌 카더스가 “그는 작은 악구에 집착한 나머지 악곡의 추동력을 잃기도 한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사실은 다소 아연하게 느껴진다. ‘무한 반복연습’이란 말에서 연상할 수 있는 기능적 세련미는 그의 연주에서 우선 연상되는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기군 간의 밸런스나 관악의 두툼한 양감, 일사불란한 현의 일치감은 그가 리허설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머릿속에 투사한 악곡의 해석을 그대로 관현악에 적용하는데 시간을 들였으며, 그 점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무한반복’ 리허설 리스트 중에서도 귄터 반트 같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첼리스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내면 잠시 첼로를 빌려달라고 한 뒤 직접 연주를 해보였다. 그리고는 “늙은 동료의 조언에 맘 상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의 치열한 연습은 할레 교향악단에 남다른 특징을 가져다주었다. 뮤지컬타임스가 언급한 ‘화염과 같은 집중력과 빛나는 온기’였다. 이들이 내놓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집이 각별한 평가를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종의 꿋꿋함이랄까, 뚜렷한 의지를 연상시키는 현악부의 치열함은 핀란드인 고유의 특성인 시수(Sisu·강인함)와 비교되곤 했다.
바비롤리는 SP시기인 1920년대부터 제법 많은 분량의 녹음을 남겼다. 훗날의 EMI인 영국 HMV와는 초기 전설적 프로듀서인 프레드 가이스버그 시절부터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오늘날 감상권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녹음은 1962년 EMI와 재계약을 맺은 뒤 이루어졌다. 그의 악곡 접근법은 거시적 구도를 잡은 후 디테일에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이었는데, 때로는 템포의 유기적 연결이 희생되는 인상을 줄 때도 있지만 분석적인 한편으로 즉물적인 인상은 주지 않는 묘한 매력을 준다. 한편으로 그가 구사한 현악의 포르타멘토에서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느낌도 든다. 동시대 평론가들의 말을 빌자면, 그는 “낭만적이지만 자아도취적은 아니”었다.
1960년 그는 미국 휴스턴 교향악단 수석지휘자를 겸하게 됐다. 1961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에 데뷔했는데 그와 이 악단의 관계는 이후 평생 이어졌다. 1963년 그는 베를린 필을 지휘해 말러 9번 교향곡을 연주했다. 당시의 연주는 20여분의 갈채를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EMI사는 바비롤리 지휘 베를린 필의 말러 9번 연주를 음반으로 발매했다. 베를린필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말러의 상품성을 깨달은 것이 이때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바비롤리의 말러 연주 준비는 대단한 시간과 체력의 소진을 요구했다. 1954년 할레 교향악단과의 첫 9번 연주는 50시간의 리허설 시간을 들였다. 마이클 케네디는 “말러가 교향곡을 작곡하느라 명을 줄였다면 바비롤리는 이 곡들을 해석하느라 명을 줄였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1970년 7월, 바비롤리는 엑스포가 열리는 일본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순회할 예정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정력적으로 연습을 이끈 그는 집에 돌아와 심장마비 발작을 일으켰다. 두 번째 부인인 이블린 로트웰이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영면에 들었다.

 

[존 바비롤리 추천 음반 Best 5]

1.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 (1966년)-할레 교향악단 (EMI)
이 곡에 대해서는 체스키사가 발매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도 많은 팬을 얻고 있다. 비난을 각오하고 말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할레 교향악단의 집중적인 앙상블과 한층 뜨거운 음색에 더 애착이 가지만 이는 처음 접한 음반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오리효과(Duckling Effect)’일 수도 있다.

 

2. 엘가 첼로 협주곡 (1965년)-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자클린 뒤 프레(첼로) (EMI)
뒤프레는 이 음반에서 자유분방하면서 투박한 시골처녀 같은 인상이다. 관현악과 솔리스트 양쪽 모두 예측하기 힘든 리듬 변화와 기복이 심한 강약대비로 이끌어가지만 서로 간에는 아연할 정도의 호흡을 유지한다. 첼리스트이기도 했던 바비롤리는 한때 사장될 뻔한 이 작품을 되살려낸 주인공으로 알려져있다.

 

3. 푸치니 ‘나비부인’ (1966년)-로마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 레나타 스코토(소프라노), 카를로 베르곤치(테너) (EMI)
때로는 텍스트를 엷게 만든다 싶은 바비롤리의 여유로운 템포가 한껏 미덕으로 발휘되는 연주. 베르곤치는 음색의 강건함과 여유로운 호흡조절이 최고의 균형을 이루는 시점이었고, 스코토는 음역대와 모음에 따라 때로 날카로와지는 발성을 아직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는 시기였지만 이 점이 오히려 순수하게 다가온다.


4. 말러 교향곡 6번 (1967년)-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EMI)
‘느려터진 만큼 속터지는 연주’라는 악평과 ‘악곡의 구조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연주’라는 양극단의 평가가 있지만, 그런 극단의 평가가 오히려 들어볼 가치를 높여주는 음반이다.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 쳐주지 않는 청자라도 최소한 느린 악장의 유기적인 연결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5. 말러 교향곡 9번 (1964년)-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EMI)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녹음에 선행하는, 베를린 필로서는 역사적인 말러 연주. 지휘자는 ‘숨은 정보 찾기’에 나선 듯 다른 연주에서 숨기 쉬운 목관악기 등의 디테일이 섬세하게 들려오지만 중간 악장들에서는 아연할 정도로 합주력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귀에 잡힌다. 4악장 클라이맥스부의 템포를 앞부분과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끌어당기는 등 논쟁적인 요소를 많이 남기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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