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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음악 가이드] 귀로, 눈으로, 행동으로 (송주호) | 2010.07.07 |
현대음악 가이드(Ⅹ)
귀로, 눈으로, 행동으로
글 _송주호 음악 칼럼니스트
관악기와 현악기로 이루어진 의미의 ‘관현악단’이라는 말은 ‘orchestra’를 성실하게 표현한 훌륭한 번역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관악기가 없는 현악기만으로 이루어진 ‘string orchestra’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관현악단’을 ‘orchestra’의 의미로 보기에는 그 의미를 한정시키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orchestra’의 어원을 찾아보니 고대 그리스 시대의 ‘오르케스트라’(orkhstra)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오늘날과 같이 음악 용어가 아니었으며, 극장에서 객석과 무대 사이에 합창단이 노래하고 춤추며 악기 연주를 하기 위한 원형의 ‘춤추는 장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오늘날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박스와 같이 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앞좌석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18세기에 와서야 대규모 기악 합주단을 뜻하게 되었다.1)
Music, 그 거대한 이름
소리를 이용한 청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음악’은 미개한 지역부터 첨단의 문화가 넘치는 곳까지 세계 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하지만 ‘music’은 소리를 뜻하는 ‘sound’나 ‘audio’와 같은 말이 어원적으로 들어 있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소리에 한정된 말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무지케’(mousike)는 음악뿐만 아니라 시와 무용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결합한 행위였다. 이러한 의미는 하나로 융합되는 조화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의 철학자인 보에티우스(Boethius, 470?-524/525)가 주창한 네 가지 ‘music’, 즉 ‘musica mundana’와 ‘musica humana’, ‘musica instumentalis’, ‘musica divina’가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에서 세상, 우주 만물, 그리고 신에 이르는 폭넓은 범위를 가진 ‘musica’는 소리나 행위보다는 ‘조화’에 가까운 의미가 있다. 이 사상에 특히 관심을 뒀던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는 우주의 조화로운 운행을 밝힌 천문학자 케플러를 주인공으로 하여 ‘musica mundana’를 뜻하는 <세상의 조화>(Die Harmonie der Welt>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화가 마티스>처럼 세 악장을 가진 교향곡으로 재작곡되었는데, 각 악장은 ‘musica divina’를 제외한 세 개의 무지카를 부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의미가 있는 ‘music’이라는 말을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한정된 말을 사용하는 우리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상상력을 선천적으로 가진 것일까. 이 상상력은 오랜 잠복기를 거쳐 20세기 작곡가들을 통해 깨어나 시각이 음악에 포함되는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선보를 벗어난 ‘그림 악보’는 그 모습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의 작곡가는 연주자들이 그림의 시각적인 인지를 소리로 변환하는 청각적인 상상력을 요구했다. 지난달에 우연 음악으로 소개한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는 이러한 그림 악보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림 악보로 유명한 작곡가도 있다. 얼 브라운(Earle Brown, 1926-2002)은 전자음악을 하지는 않았지만, <1952년 12월>이라는 그래픽 악보로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 그림 악보에는 길이와 두께가 다양한 가로 선과 세로 선으로 그려져 있을 뿐인데, 연주자들은 이 그림을 소리로 바꾸는 무한한 상상력을 작동시켜야 한다.2) 실바노 부소티(Sylvano Bussotti, *1931)의 그림 악보는 보다 전통적(?)이다. 그는 당시 아방가르드 음악계의 중요한 피아니스트였던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 1926-1996)를 위해 <데이비드 튜더를 위한 다섯 개의 피아노 작품>(1959)을 썼다. 이 그림 악보는 오선보에 음표를 음의 진행을 암시하는 듯한 선들이 엉켜 있다. 하지만, 이 ‘선의 연주’는 전적으로 연주자의 상상에 달렸다.
디터 슈네벨(Dieter Schnebel, *1930)은 여기에 더 나아가 소리로 바꿀 필요가 없는 ‘읽는 음악’ <Mo-No>(1969)를 썼다. 기존의 우연 음악이 작곡가의 의도를 배제한 것이라고 해도 관객은 연주자의 의도로 포장된 소리를 일방적으로 전달받았는데, 슈네벨은 이 곡을 통해 마치 문학 작품을 읽듯이 모두 ‘읽는’ 관객들이 각자 자신의 의도로 해석하고 상상하도록 유도한다.3)
하지만, 그림 악보가 기본적으로 ‘소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의 퍼포먼스는 음악 자체가 시각적인 동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원을 갖고 있다. 그의 <One for Violin Solo>(1962)는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로, 10초도 걸리지 않는 녹음은 그다지 의미가 있지 못한다. 그렇기에 <존 케이지에 대한 찬사>(1958)와 같은 그의 행위 작품들은 시청각적 행위로서의 어원적인 ‘music’을 회복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음악이 청각에서 시각으로 뻗어 나갔다면, 다른 감각, 즉 후각, 촉각, 미각 등도 시도해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랴.4) 어떻게 보면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바로 이러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는 공간에서 관객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두게 되고, 그래서 그 모든 감각을 통해 ‘music’을 받아들이게 된다. <4분 33초>야 말로 진정한 ‘musica mundana’를 추구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1) ‘합창’이라는 의미의 ‘chorus’도 고대 그리스에서 합창뿐만 아니라 무용을 하는 퍼포먼스 집단을 뜻하는 용어였다.
2) 이러한 상상력은 작곡가의 의도에서 상당히 자유롭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우연음악의 한 종류로 본다.
3) <Mo-No>에는 여러 음악 기호와 다양한 그래픽들이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4) 다양한 감각의 동시적인 활용은 영화에서는 ‘4D’라는 이름으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